“이제 와서 물으면 조금 우습지만,”
작업 도중 문득 던지는 말. 카뮤는 악보를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소녀. 그의 인생에 유일하게 허락된 사랑. 카뮤가 문득 그런 감회에 젖을 무렵, 소녀가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왜 저를 사랑하게 됐어요?”
순수한 의문이 담긴 말에, 카뮤는 문득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아아, 그래. 그의 연인은 저토록 어리석고, 외로웠다.
“이유 따윈 없다. 너라서, 라고 말한다면 이해하겠는가?”
“으응, 선배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소녀는 흐드러지게 웃는다. 카뮤는 마주 웃으며 속삭인다.
“당연한 말을. 의심 할 바 없이, 사랑하고 있다.”
100번째로 반복하는, 사랑의 말.
파르바네, 현에게 고백을 한 지, 혹은 받은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가. 카뮤는 문득 그 사실을 떠올린다.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그러나 그의 인생에 있어서는 아주 아득한 저 편과 같은 이야기다. 어리고, 무지하고, 필사적이던 시절. 무엇도 모르고, 둘 모두 어리석던 시절이었다. 그녀가 열다섯에, 제가 스물. 시간만 따진다면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뮤는 가만히 과거를 돌아보다가 가볍게 비웃는다. 그 시절의 제가 지독하게도 멍청했고, 그녀의 사랑이 지독히도 오래 이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던 탓이다.
인생에 단 한 번 찾아오는 운명.
크리스자드, 카뮤는 그녀를 그렇게 정의했다. 그의 길지 않은, 어쩌면 길게 이어질 인생에 있어서 단 한 번의 운명이라고. 그는 운명이나 알 수 없는 숙명에 이끌리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으나, 그녀에게 있어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겨울, 이 겨울이 끝난다는 사실도 모르고 사는 사람에게 그토록 달콤한 봄의 향기를 흘려 넣은 사람을 어찌 거부할 수 있던가. 그는 제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한 순간에 깨어져나갈 백일몽이라 하더라도.
그래, 언제였던가. 청혼을 준비하던 그 날. 정신없이 제게 달려와 우는 그녀를 본 적이 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하여, 되돌릴 수 없게 되면 어쩌냐 처절하게 묻던 순간이 있었다. 분명 그 순간에 카뮤는 그녀에게, ‘떠날 생각은 없다.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라고 이야기 했지. 그러면 파르바네는, 현은 간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크리스자드,’
그 목소리가 어찌나 처절했던지.
‘나는 당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나는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 크리스자드라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서서, 그는 세계가 깨어져 나가는 경험을 했다. 소녀는 그의 생각만큼 상냥했고, 그의 생각보다 외로웠으며, 그가 상상할 수 없는 과거를 지녔다. 그 사실이 그 순간만큼 심장에 박혀들던 때가 있던가?
카뮤는 그녀가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만 해도 어찌 할 줄 모르는 아이와 같았다. 그녀가 사라진 세계라니, 어불성설이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어찌 그의 봄이 그녀 없이 성립할 수 있지? 겨우, 겨우 마주한 겨울의 끝인데 어찌 그녀가 떠나간단 말인가.
그렇게 둘 다 혼란스러운 날이었다. 어찌 할 바 모르는 소녀와 청년 둘이 서서 하염없이, 끝없이 지금의 사랑을 속삭였다. 우는 소녀는 언젠가 제가 그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라며 울었고, 청년은 그녀를 토닥이며 이미 입은 상처를 필사적으로 갈무리했다. 그녀에게 보이면 그녀가 상처입고 떠나갈까 두려워 제 상처는 보이지 않게 숨겼다.
카뮤는 그 날, 청혼을 위해 본국에서 가져온 반지를 조용히 서랍에 넣었다.
그녀에게 이 것은 필시 족쇄가 되고 만다. 청년은 이제 그 정도 사실을 알 수 있을 만큼 그녀를 알았고, 사람을 알았다. 그러니 차마 내밀 수 없다. 그는 족쇄를 채워서라도 그녀를 옆에 두고 싶으나, 그녀가 그 사실을 바랄 것인가? 그녀가 바라는 것은 모두 주고 싶다. 모든 일을 해 주고 싶다. 그만큼 카뮤는, 크리스자드는, 이름을 불리지 못한 그 작은 어린아이는. 어쩔 줄 모르고 그녀를 사랑했다.
그의 옆에서 불행하며 그를 미워하게 된다면, 차라리 제가 괴롭더라도 그녀를 보내 주고 싶었다. 저 멀리서 그녀가 행복한 모습을 본다면, 그를 좋은 ‘친구’로 라도 인생의 일부에 남겨 준다면. 그는 그녀의 인생을 옆에서 지켜보며 행복을 나눌 수 있겠지. 그러나 그 행복 속에 다른 사랑이 들어간다면 그는 어찌해야하지? 그는 그녀가 다른 사람과 사랑한다는 상상만 해도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버틸 수 없다. 분명 그 자를 죽이고야 말 것이다.
정녕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말인가?
오래 된 상처와 생기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에서 모두 피가 흐른다. 흉터로 남은 줄 알고 신경 쓰지 않았던 상처들이 일제히 벌어져 고통을 호소한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신음하면서도, 카뮤는 그녀에게 찾아가지 않았다. 약해 지키지 못하는 그는 가치가 없다. 상처 입은 사실을 보이지 않는 것은 아주 어릴 적부터, 그가 해 오던 일이다.
“저기, 선배. 같이 자도 괜찮아요?”
그러나 3류 드라마처럼, 연극처럼, 소녀는 그의 방에 찾아든다.
“ㅁ, 물론이다.”
“……? 웬일인가요. 답지 않게 당황해서.”
소녀의 말에 카뮤는 제가 동요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안 된다. 그녀의 말대로 이건 ‘답지 않은’ 일이다. 얼음 백작으로, 여왕의 검으로, 그리고 그녀의 기사로 살기 위해서라도. 그는 이런 일에 이토록 흔들려서는 안-
“뭐, 이런 선배도 좋네요. 선배, 언제나 열심이었으니까.”
그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녀를 똑 닮은 그믐밤이 깊어간다. 그 순간의 기억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워, 크리스자드는 입을 다문다. 그 날 이후로 수많은 밤이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 무겁고, 노래로 부르기엔 너무 아름다운 밤들. 그 내내 그녀는 그에게 확신을 주었고, 그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몰랐다. 그리고, 그리고, 긴 긴 밤이 흐르고 나서야.
“늘 신기해요. 당신이 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원한다면 몇 번이고 말하겠다. 사랑해, 사랑하고 있다, 고.”
“그런 걸 바라진 않아요. 당신은 잘 알아. 그냥, 이건 내 문제예요. 당신의 사랑은 내게 닿지 않아요. 그냥,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크리스자드는 소녀가 그토록 두려워 한 이유를 알았다.
“…….”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저는 신경 안 쓰니까.”
그냥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이런 말을 할 뿐이에요. 웃으며 덧붙이는 말 하나하나가 카뮤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녀의 아픔을 몰랐던 저 자신이 한스러웠고, 저 말의 너머에 얼마나 큰 외로움이 잠들어 있는가 알고 있어 아팠다. 그녀가 저 대신 울던 그 날과 같은 심정이 되어,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플 정도로, 그녀가 아프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야, 아파요. 선배.”
이런 말이라도 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 날 이후로는 필사적인 나날이었다. 온 사랑을 퍼붓고, 표현하고, 어쩔 수 없이 문을 두드리는 날. 카뮤는, 크리스자드는, 제게 이런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토록 오래 사랑을 퍼부을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녹아내려 한심해도 상관없다, 고 생각한다. 이대로 사라져도 괜찮다고, 그녀에 대한 사랑만이 남아서 그 무엇도 아니게 되더라도, 그녀가 행복해 진다면.
그리하야 어느 아름다운 겨울 날.
“선배, 참 신기한 일이죠?”
그녀가 드디어 이야기했다.
“어느 순간에, 당신이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는 당신의 사랑에 푹 젖어서, 같은 세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말아요.”
꼭 100번째로 사랑을 속삭이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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