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깊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마침내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이 된다.
-헬렌 켈러
나는 내가 늘 혼자라고 생각하였다.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는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는 삶. 그래, 늘 삶이란 부질없지. 허나 끈질기고 쉬이 사라지지 않아. 죽음 너머에도 삶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니? 나는, 실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건만.
모두 놓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랑이 나를 살게 하였다. 늘 부정하고, 가볍게 여기던 이성간의 사랑이 나를 살게 하였다. 흥얼거리는 어조로 늘 입속에서 머무는 낯선 사탕. 사랑, 사랑. 나는 너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었지.
바이올린 선율 위에 살짝 올려진 그 이름이 나를 살게 한다.
카뮤,
크리스자드,
론도
나의 사랑하는 백작님.
그 위에 파르바네가 올라간 게 언제였더라?
음악은 돌고 돈다. 캐논처럼, 당신의 이름처럼. 첼로가 섞이고 비올라가 섞이고 세컨드 바이올린이 섞이고. 그럼에도 돌고 돈다. 나는 끝없이 회전하는 음악의 오르골. 그리고 그 속에 말려든 당신은.
욕심쟁이 같은 나는 당신에게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을 모두 주고서도, 더 주고 싶어서 당신을 나로 만들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그 완벽하기 그지없는 사랑을 주고 싶어서 크리스자드 R 카뮤와 현의 경계를 허물었다.
음악은 처음으로, 처음으로.
마침내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 결국 우리는 서로의 일부분이 되고 하나의 영혼이 되었다.
내가 알기로 세상을 서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상처받기 마련이다.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서정성 자체가 고통에 대한 면역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은희경, 새의 선물
그렇게 생기지 않아 상냥하던 당신을 내가 기억한다. 나를 그리도 냉하게 대하여 겨울 속에 내던져 주었던 당신을, 내 세계의 색채를 모두 몰고 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군림하던 당신도 기억한다. 내 멋대로 당신을 내 구원으로 삼았지. 그런 당신이 누군가에게 충성한다는 사실이 내게 얼마나 상처를 주었던가. 나는 당신의 충성을 받고나서 얼마나 울었던가.
영원의 사랑은 부질없고, 오로라는 그저 과학으로 풀어낼 수 있는 환상에 불과하다.
내 모든 지식은 우리가 상처받으리라 이야기하고 있다. 서정적으로 차가운 사람만큼 상처를 쉽게 받는 사람이 없다 하였다. 상처받아 절규하는 영혼을 사랑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당신은 아름답다. 상처 입어도 아름답고, 고귀한 긍지 아래 있어도 아름다우며, 사랑할 때 가장 아름답다.
서정적인 얼음이 당신의 모든 방벽을 무너뜨렸으나 괜찮다. 내가 있지 않은가.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내가 되어. 당신이 맹세하고 믿는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을 손에 쥐었다. 나는 당신이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 있다.
나의 마스터피스. 나의 걸작.
나를 완성시켜줘.
이 초겨울 아침도
첫 눈도,
그대 사랑도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종환,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귀한 백작이 불안해하였다. 귀족적이지 않은 태도, 검에게 어울리지 않는 약함. 그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긍지.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를 인간으로 만들고, 카뮤로 머물게 하고, 그 너머 크리스자드를 부여한 사람이 있는데.
사랑을 알았고, 그녀를 알았다. 우리는 완벽히 하나가 되어 인생을 살아가기로 하였다. 그러니 그녀가 제 세계와 다른 곳에 산다고 해서 제가 불안해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자신은 자신을 떠나지 못하는 법이다. 한 영혼은 서로 갈라지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현. 나는 왜 불안해지고야 마는가.
너는 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처음 만난 그 날 부터, 인간의 감정으로부터 유리되어, 마치 인형처럼. 시체처럼. 겨울의 화신처럼 내게 다가왔다. 나비야, 나비야. 나비, 얼음 나비가. 손에 쥐면 녹아내릴 나비가.
그가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는 결국 그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왜 슬프지가 않지.
붙잡을 것 없는 텅 빈 밤이면
너의 텅 빈 마음을 파고드는 꿈을 꾸기도 하다가
-황경신, 빈 의자
첼로가 끌리는 날이 있다. 악기의 그 미지근한 온기만이 사람의 심장에 와 닿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첼로를 품에 안는다. 켜는 것이 아니라, 첼로를 품에 안는다.
그는 사랑을 알고 나서야 여왕폐하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첼로의 소리는 눈, 어둠, 고독의 소리. 고독의 무겁고 장중한 선율. 텅 비어 있는 악기 속으로 소리가 울린다. 손에 무엇도 쥐지 못한 백작의 선율이 텅 빈 악기 속을 울리고, 공허를 울리고, 마음을 울린다.
그녀는 저를 사랑한다 말하며 더 이상 첼로를 켜지 않는다.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배려요, 사랑의 표현 방식이었다. 그녀가 제 세계의 일부분을 기꺼이 떼어 그로 만들었다. 그러니 카뮤는 첼로만이 그녀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텅 비어 공허한 곳에 울려 퍼져라. 고독을 알게 하고, 눈을 알게 하고, 어둠을 알게 하여라.
무지하고 어린 죽음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추모는 이 뿐이니.
아, 껴안고 싶은 밤이다
아니다, 버리고 싶은 밤이다
-홍영철, 홍초가 보고 싶어
당신은 날 너무 잘 알아. 아니, 나를 모르는 '나'는 존재하지 않겠지.
나는 차갑고 작은 몸을 끌어안는다.
첼로의 소리가 울린다. 장중하고, 무겁게. 마치 레퀴엠처럼, 진혼가처럼, 장례식장처럼. 생각은 아직도 론도. 마디마디 끊겨 돌아가는 생각이 톱니바퀴 같다. 아, 껴안고 싶은 밤이다. 나는 나를 꼬옥 껴안는다. 온기 하나 없는 팔이 마치 시체와도 같다.
이 육신이 이미 인형과 같아진 지가 언제인데 나는 시체를 운운하는가.
인형의 처지를 부러워하고야 마는 밤이 오면, 나는 첼로의 추모를 들으며 내 속의 공허를 깨닫는다. 다, 다 끌어안고 싶다. 인간의 감정도, 눌러두었던 슬픔도. 저 아래 출렁이는 바다는 어둠을 모두 모아두었다. 그래서 첼로의 소리가 된다. 고독, 사랑, 아픔, 외로움.
왜 날 버렸나요?
아니다, 버리고 싶은 밤이다.
네가 쓰러졌는데도 난 몰랐고
내가 우는데도 넌 몰랐지 꼭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 같았지만
첼로의 소리는 밤새 이어지고, 내가 나를 끌어안고 보내는 시간은 길어지고.
카뮤는 현의 눈물을 몰랐다. 현은 카뮤의 고독을 몰랐다. 서로 너무 가까워서 모르는 일이 있었다. 결국 본질적으로 타인이었기에 생기는 간극을 그들은 영영 몰랐다. 너무, 너무 일찍 완성되어버린 탓이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내정된 운명에 휘말린 탓이었다.
결국 이렇게 자신이기에 무지해지고, 우리는 꼭 모르는 사람들 같았지만.
거짓말처럼 소리 속에서 당신이 튀어나와 나를 끌어안고 온기를 나누어 주는 순간이 있다.
너무 지쳐 쓰러지고 싶은 순간에 자그마한 몸이 그를 지탱하는 순간이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건
단 하나, 빛나는 우리 인생의 별
-허수경, 박하
무엇을 사랑하는가. 자신을 사랑한다하여 어찌 나르시스트라 말하지? 사랑하는 이가 어찌 틀 속에 갇힐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의 사랑을 어찌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어둠 속에서 단 하나의 별처럼 반짝이는 이 보석을 인간의 언어로 감히 재단할 수 있을 리 없다. 더 본질적인 이야기, 음악으로도 할 수 없는데.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하였다.
무엇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사랑. 그러나 우리는 별을 쫓는 사람 (Star Seeker). 어둠 속에서 오직 반짝임 하나를 쫒아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
한 번 뿐인 생의 절대적인 가치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거의 모든 것의 세계가
죽은 줄도 모르고 끝없이 죽고 있어요
-김선재. 가벼운 나날
파르바네가 죽은 게 어디 하루 이틀의 일이던가.
카뮤의 인간적인 감정을 죽인 게 어디 일이 년 전의 일이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죽였다.
나의 세계 속에는 썩지 않는 시체가 두 구. 당신의 세계 속에는 흉터로 남지 않아 쓰다듬어 줄 수 없는 상처가 셀 수 없이 많지. 그럼에도 우리는 아픔이 아직 부족하다 여겼다. 어쩌면 모두가 그랬다. 이 이야기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모두가, 무대 위에서 춤추는 모두가 우리 자신을 끝없이 죽여가고 있었다. 마지막, 오지 않을 마지막을 살아서 보고 싶다 갈구하며.
그럼에도 사랑이 빛난다. 우리 인생의 별, 보석, 유일한 구원. 사랑하지 않고 구원할 수 있다. 그건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우리의 세계에서는, 사랑이 구원이었다. 오직 유일무이한 사랑만이,
죽음에서 인간을 살아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2016.12.01 첫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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