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치마가 휘날리고, 찾아보기 힘든 짧은 머리가 볼에서 흔들린다. 무심한 눈은 볼 수 없는 저 먼 곳을 응시하고, 바람은 살랑살랑 끊임없이 불어온다. 부드럽게 공기는 움직이며 소녀를 감싸 안고, 이내 땅에서 벗어난 소녀가 편안하게 몸을 허공에 맡긴다. 몸을 받쳐 줄 그 무엇도 없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침상위에 기대기라도 한 자세로 편안히 누워있다.
한 번 강하게 불어 닥친 바람이 차분히 가라앉아있던 머리카락을 들어올리고, 곱던 소녀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용의 얼굴이 드러난다. 머리칼로 가린 왼쪽 얼굴의 전부를 뒤덮고 있는 용은 조금 더 자세히 바라보면 왼쪽 얼굴을 시작으로 온 몸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쉬이 알 수 있다. 왼쪽 눈은 용의 눈과 겹쳐있고, 인간의 눈과 달리 저 먼 곳을 응시하며 볼 수 없는 곳을 바라본다.
펄럭, 거대한 날개가 공기를 밀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왼 팔을 앞으로 뻗고, 오른손의 손가락이 나긋하게 팔을 더듬는다. 지익,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소매가 갈가리 찢어졌다. 팔을 뒤덮은 용의 비늘이 튀어나가고, 거대한 몸체가 허공에 펼쳐진다.
[오랜만이로군.]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한 몸을 쓰며 안부를 묻다니, 여간 괴짜가 아니로구나.]
"새삼스러운 말도 아니옵거니와, 지금은 손님맞이를 해야 하옵니다.”
뒤로 가타부타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거대한 용의 머리가 소녀를 위에 얹고, 소녀는 익숙하게 몸을 고정한다. 그리고 공기를 가르며 빨라지는 속도. 볼을 스치는 바람이 차갑고, 평범한 인간이라면 숨을 쉴 수 없는 속도다. 허나 용의 계약자라는, 인간을 벗어난 존재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저 멀리 다가오는 검은 점은 흰 색의 드래곤으로 변하고, 그 순간 용의 계약자는 몸을 날린다.
펄럭이는 치마, 휘날리는 머리카락. 용의 문양이 사라지고 온전한 얼굴이 드러난다. 무덤덤하고 신비한 아름다움.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에서 언어가 흘러나오고, 의지는 언어를 통해 구체화 되며, 용의 의지는 자연을 지배한다. 허공에서 솟구치는 물. 드러낸 왼팔을 덮고 손끝을 통해 허공으로 퍼져나가는 물은 얇게 늘어나 그물을 형성한다. 주변을 구체의 형태로 감싼 그물. 거대한 무대에 입장한 이들은, 흰 드래곤과 그 라이더.
“소녀의 나라에 입성한 것을 환영하옵니다. 청룡의 계약자, 현입니다.”
“실크팔레스의 백작, 흰 드래곤의 라이더, 카뮤다.”
거대한 구가 서서히 좁혀들며 드래곤에게 쉴 자리를 제공한다. 저 멀리 북국에서 날아온 생물은 지칠 대로 지쳐, 제공된 배려를 거절하지 않는다. 거대한 날개를 접고, 물로 된 그물침대에 몸을 누인다. 그 모습에 백작은 얼굴을 찌푸렸으나,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피곤에 찌들어 있음을 알고 못마땅한 얼굴로 묵인한다.
소녀는 그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다가, 그들이 자세를 잡고 나서야 본론을 꺼낸다.
“이 곳에서 국경이 시작됩니다. 수도로 갈 예정이오니, 부디 드래곤의 힘을 잠시 거두어 주시겠습니까.”
“어찌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지?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럴 생각은 없다.”
“용의 가호를 드리지요. 제 가호라면 죽을 일은 없을 테니.”
“하, 소국의 용 따위를 믿으라?”
가리지 않는 말이 분위기를 파국으로 몰아간다. 용의 거친 울음이 공기를 위협적으로 흔들고, 계약자 또한 굳이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가리지 않는다.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백작과 소녀의 기가 팽팽하게 대치한다. 잔뜩 지친 드래곤은 날갯짓하며 제 라이더를 지키려 떠오른다. 정적, 긴장감. 나뭇잎 하나라도 끼어들면 깨질 긴장감이 팽팽하게 대치한다.
“소국이라, 실크팔레스라는 국가는 소녀는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작은 북국에서 온, 왕자도 아닌 백작이, 감히 동제국을 모욕하신 것입니까?”
“동제국이라, 허나 겨우 동쪽의 나라 하나일 뿐이다. 실크팔레스는 서쪽에서도 손꼽히는 강국이지. 동쪽의 나라 하나 멸망시키는 게 어려울 성 싶은가?”
“허나 백작의 목숨도 지금 끊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 쉬이 죽어주지는 않는다.”
용과 드래곤은 낮게 으르렁거린다. 제 사람이 공격범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서로의 목덜미를 향해서 달려들 준비가 끝났다. 용과 드래곤. 한 번도 붙어본 적 없는 상대이기에 서로의 힘을 가늠할 수 없으나 그들은 자신의 승리를 의심치 않는다. 둘 다 제 대륙에서는 최고의 힘을 가졌다 평가받던 이들이다. 패배를 겪어보았을 리 없다.
카뮤, 실크팔레스의 백작. 흰 드래곤의 라이더. 서대륙 최고의 라이더 가문의 가주. 젊은 가주는 서대륙 내에서도 이길 자가 없는 걸로 유명하다. 그 드래곤의 이름은 알렉산더로, 흰 드래곤 종족의 알을 직접 데려다 길렀다고 한다. 그게 그의 나이 17세 때의 일로, 3년이 지난 현재, 그들은 최고의 드래곤과 라이더로 불린다. 허나 그와 대치하고 있는 이도 그리 만만한 이는 아니다.
현, 동제국의 재상집의 규수. 청룡의 계약자. 사방신 중 청룡을 몸에 받아들여 계약한 이로, 역대 계약자 중 그녀처럼 강한 힘을 끌어내고 쉬이 의지를 움직인 이가 없다 할 정도로 강한이다. 수도 없는 전쟁에서 이겨왔고, 수없는 가뭄을 해결하였으며, 제가 원한다면 제 나라를 세울 수 도 있는 인물이다. 서대륙 힘의 중심을 카뮤라 한다면, 동대륙 힘의 중심은 단연 그녀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방신의 계약자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은 이 시점에서, 누굴 힘의 중심이라 칭하겠나.
날카롭게 다듬어진 기감이 전투를 예감하고 잘게 진동한다. 공기의 진동 하나하나가 시끄럽게 울리고, 쉴 자리가 되어주던 물은 가시를 세우고 공격의 때를 기다린다. 저 그물을 조이기만 하여도 백작과 그 용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으리라. 이미 판을 깔고 시작한 전투다. 그녀가 질 가능성은 그에 비해 현저하게 낮기만 하다. 그럼에도 오만한 백작은 숙일 생각이 없다. 그녀가 나라의 귀빈을 제 의지만으로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독히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결국 먼저 넘어가자 청하는 이는 소녀이다. 허나 그녀는 자존심을 죽이고 그리 행동함이 아닌, 그저 그를 천치 취급했을 뿐이다.
"힘 낭비는 그만토록 하지요. 이 결례는 여독을 풀지 못한 인간의 망언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허나, 백작. 다음은 없습니다. 부디 소녀의 인내심을 시험치 말아주시길."
"하, 사과라도 바라나? 나는 이곳에 여왕님의 대리자로 왔다. 허니, 네게 숙일 이유가 없다. 계집."
"저도 이곳에 여제님의 대리자로 왔습니다. 백작. 저에 대한 무례는 곧 제국에 대한 무례. 제가 진정으로 전쟁을 일으키길 바라십니까?"
"바라던 바로군."
"오만하신 분. 언젠가 그 오만이 대가를 치르게 만들 테니 부디 겸손을 배우고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날카로운 분위기의 첫 대화가 막을 내렸다. 결국 백작은 그녀의 말에 따라 용의 힘을 줄인다. 그의 왼손에도 복잡하고 섬세한 문양이 새겨지고, 거대한 백색의 드래건은 어깨에 올라갈 수 있는 크기로 변해 그의 어깨에 올라탄다. 그 모든 과정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소녀는, 물의 구를 움직여 허공에 탈것을 만들어낸다. 거대하던 용은 다시 몸을 돌려 소녀의 몸에 스미고, 훤히 드러난 맨 팔 위로 용의 비늘이 그려지고 앞머리 아래 감춰진 왼눈에 용의 얼굴이 겹쳐진다. 일련의 과정을 끝내고서야 소녀는 가마에 올라탄다.
"처소는 궁내에 주어지며, 같은 처소에 제가 거처하게 될 예정입니다. 허나, 오해치 마시길. 현재 동제국에서 피해 없이 드래곤을 제압할 수 있는 이가 없어 소녀가 묵게 되었습니다. 헛된 마음이라도 품으신다면,"
"그럴 일은 없다. 그리 밋밋한 여인은 취향이 아니야."
"무뢰한이시로군요. 어찌 여인에게 그리도 상스러운 말을."
"여인이었나? 전장에서 날뛰는 모습은 여인이라기보다는, 광인에 가까웠다만."
"소녀가 여인이라는 사실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으나, 무뢰한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도 약하게 생기시어, 어디 남자 구실은 가능하실지 모르겠군요."
얌전히 소매로 입을 가리며 눈을 휘는 모습에,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이는 백작이다. 대화는 단절되고, 침묵이 내려앉는다.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고, 빈틈을 내보이지 않은 긴장상태가 지속된다.
카뮤는 제 앞에 앉아있는 소녀가 꽤나 고운 얼굴이라고 인정했다. 본국에서는 보지 못한 생김새의 인간이다. 동대륙의 인간들이 서대륙과 다르다는 사실은 문헌으로 전해지나, 실제로 본 일은 처음이다. 밝고 화려한 머리색이 많은 서대륙과 달리 단아하게 떨어지는 검은 머리나, 오묘한 색의 눈. 검은 눈 위에 겹쳐진 진청의 색이 마치 수면과 같이 일렁인다. 저 눈이 청룡의 계약자의 상징이라 하였나. 몇 천 년이나 몇 백 년에 한 번씩 태어나는 계약자들. 반만년을 이어져 온 동제국에서도 몇 나오지 않은 청룡의 계약자. 카뮤는 순순히 그녀가 보통 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허나, 인정하였다 하여 그를 받아들이지는 아니한다. 그저, 그녀에 대한 평가를 조금 상향조정하였을 뿐이다. 본국에서 제 외모에 반해 따라다니던 영애들 보다는, 낫다고 해줘야겠군.
수면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섬세하게 그를 관찰한다. 무심하고 차가운 얼음과 같은 외모와는 달리 꽤나 다혈질이다. 아마 젊음으로 인한 혈기가 아니겠나. 그리 소녀는 추측하였다. 나이로 친다면 소녀가 다섯은 어렸으나, 청룡의 기억을 일부분 공유하는 계약자는 인간의 감정에서 유리된다. 불타오르는 감정이 아니면 계약자에게 닿지 못한다. 덕에 소녀는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백작을 관찰한다. 여리여리한 생김새와 달리 꽤나 거구이다. 동제국의 소문난 무장들과 맞먹는 키. 가늘고 색이 옅은 생김새이기는 하나, 팔과 손에서 보이는 단련의 흔적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무력을 갖추었다 이야기하고 있다. 거대한 드래곤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아 전투 경험도 적지 않으며, 알려지지 않은 능력이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서대륙을 대표하여 동대륙으로 올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용의 무서움에 제게 다가오지 못한 무장들 보다는 나은 이군요.
최악의 첫인상과 만남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평가는 꽤나 괜찮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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