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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admin 2018.11.18 01:01 read.0

  입술은 거짓을 말하죠, 그러니까 눈으로 말해요. 크리스자드.

 

  오랜만에 부르는 이름이, 지독히도 낯설다고.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사랑을 가장해 상냥하게 내뱉은 말은 허망하게 눈 속으로 녹아내린다. 눈송이가 누군가의 콧등에서 녹아내리는 모양으로, 그렇게 녹아내려 버렸다. 눈이 내린다. 펑펑, 나쁜 기억을 모두 덮어버리려는 양 눈이 내린다. 그 가운데 서 있는 연인은, 연인에서 남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아니, 가까워졌다 멀어진 사이는 남 보다 못하다. 그건 확실한 이야기이다.

  열정적인 사랑은 아니었으나 평생동안 함께 할 사랑이라 느꼈다. 허망한 믿음이고 한심한 기대일 뿐. 사랑의 유통기한은 모두 지나가버렸고, 누군가의 사랑은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가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눈 내리는 날 마주서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렇게. 차마 한 마디를 먼저 내뱉지 못하고.

  좋았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고, 슬픔을 내뱉고 기쁨을 나누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기억 속의 사랑은 너무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영영 깨지지 않을거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아직 살아숨쉬는 그 시절의 연인들이 저를 봐달라, 우리를 기억해달라 비명지른다. 허나 모두 부질없는 행동이다. 과거는 과거에 남아있어야만 한다. 가소롭게 현실 따위에 올라오는게 아니라.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소녀였다. 이제 여인이 되어버린 소녀였다.

 

 

  "당신은 결국 제멋대로라서 좋았어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말하는군, 파르바네."

  "아니었나요? 당신은 관계에 있어서는 무지한 어린아이였죠. 하고 싶은 말을 전하지 못하고, 심정을 정하지 못하고."

  "그에 대해 불만이라도 가졌나?"

  "그럴리가요. 저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 모순조차."

 

 

  여인은 웃어보였다. 청년은, 어딘가 묵직한 통증이 치고 올라옴을 느꼈다. 허나 그 통증이 사랑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과거의 행복했던 저에 대한 애도일 뿐. 그는 그리 생각하기로 하였다. 제가 지금 몹쓸짓을 한다는 사실도 알지만, 그대로 묻어둔다. 이 상황에서 자세히 생각하여 달라질 일은 없다. 그저 긍지가 상하고 명예가 더럽혀지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면, 구태여 그럴 이유가 무어있는가.

 

 

  "크리스자드."

  "그 이름은 이제 부르지 않았으면 하는군."

  "매정하네요, 당신은 이제 새 이름을 찾아 갈 생각인가요?"

 

 

  비수처럼 내던진 말이 그의 심장에 박힌다. 사랑의 감정으로 받은 이름이 카뮤 대신 그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허나 사랑이 식음과 동시에, 그녀를 떠나기로 마음먹음과 동시에 이름을 버렸다. 사랑으로 지어진 이름을 가차없이 버렸다.

  그녀는 그가 이름을 버렸음에 둔탁한 통증을 느꼈다. 예리한 통증은 아니었다. 그녀는 감이 좋았고, 아주 예전부터 이별을 대비해 왔으니까. 그를 잊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잊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니 그녀는 제 사랑을 모두 부정하려는 그에게 심술이 났을 뿐이다. 그녀또한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당신은 늘 제멋대로에요. 멋대로 제 마음을 가져가고, 이제 멋대로 포기하라고 말하네요."

  "반한건 네가 먼저지 않았나. 그러니 끝내는건 내가 할 뿐이다."

  "그 점이 멋대로라는 거에요, 카뮤."

 

 

  선배, 크리스자드. 애정을 담았던 호칭은 이제 딱딱한 이름이 된다. 그의 이름이 아닌, 백작이 이름을 부른다. 그 이름을 부르는 입술이, 카뮤는 참 낯설다고 생각했다. 몇 년을 보아온 그녀지만, 그 이름을 부르는 입술은 낯설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보였다.

 

 

  "이제 다시 볼 때는 사적인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으면 한다. 파르바네."

  "물론이죠, 카뮤. 다시 만날 때에는 부디 제 이름을 부르지 말아주세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도 그녀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공적인 관계, 그들의 만남에 있어서 거의 없던 그 짧은 순간. 그 순간을 되짚기 위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들은 결국 프로였다. 몇 년을 연예계에서 구르며, 가면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결국 견고한 가면이 서서히 그들의 얼굴을 뒤덮는다. 차갑던 표정은 몽환적인 미소로 바뀌어가고, 얼음과 같은 눈동자는 달큰하게 녹아내린다.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우리의 이별 또한 모두 뮤즈의 뜻이겠지요."

 

 

  헛소리. 그들은 서로가 하는 말이 영혼 하나 담기지 못한 헛소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허나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들의 영혼이 가득 담겼던 시간은 이미 풍화되어가고 있는데. 사랑의 빛을 잃은 추억이 서서히 부서지는 동안, 그들은 가면을 쓰고 서로를 마주대했다.

 

  돌아서는 순간, 그들의 얼굴 위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놀랍도록 똑같은 표정을 지었던 여인과 청년은 이내 제 갈길을 걸어간다. 반대 방향. 서서히 눈이 그치고 있다. 그렇게 봄은 찾아온다. 새로운 봄이 찾아 온다

 

첫 업로드 201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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