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추워진 공기에서 겨울내음이 난다. 싸하고 차가운 향. 아직 입동도 오지 않았는데 벌써 겨울이다. 시간의 흐름이란 참으로 얄궂고 가차 없는 종류의 물결이라서,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저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훌쩍 쓸려와서 전혀 모르는 곳에 혼자 서 있기 일쑤다. 지금도 그랬다. 선명한 여름의 아픔은 어느새 썩어 문드러졌는지 느껴지지 않는다. 얼어붙은 상처를 감싸 안아 녹일 기분조차도 들지 않아 그저 얼어붙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슬슬 장갑과 핸드크림의 계절이다. 괜히 손이 얼면 연습할 때 힘든데, 빨리 장갑을 꺼내야겠다.
우습게도 하늘은 흐리다. 흐리고도 맑다. 부분부분 검은 구름이 하늘색을 가이고, 하늘은 조금 짙은 색을 뽐낸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해가 지면 꽤나 멋있는 풍경을 연출 할, 그런 하늘이다. 그 때 쯤 카메라를 들고 나와서 구경해도 괜찮겠네. 사진을 찍어 남겨두면 지금의 겨울향기를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추위에 움츠러드는 몸을 억지로 펴며 곧 아름답게 불타오를 하늘을 상상했다. 선배하고 같이 나올까. 당신의 백금발이 노을빛에 물드는 모습은 분명 아름다울 테니까. 상실의 아픔을 겪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사이에 제 세상의 중심을 바꿔버렸다. 그런 꼴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당신을 떠올리면 그 조차도 정당한 일이라는 기분이 든다. 당신은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겨울바람이 매섭게 달려든다. 냉기에 난도질당하는 목과 얼굴. 조금 더 옷깃을 여몄다. 감기라도 걸려서 목을 못 쓰게 되면 당장의 일정이 문제가 된다. 아프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여줄 테지만, 제 성정이 그를 허락하지 않는다. 몸관리 또한 프로의 소양이라는 지론에 맞춰 저는 아프지 않을 의무가 있다. 조금 더 옷깃을 여민다. 바람이 그 작은 틈새를 파고 들어와 목에 손을 뻗었지만, 이제 그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어 버틸 수 있다. 그에 화나기라도 했을까, 다시 한 번 강하게 바람이 불었다. 눈을 뜨기도 어려울 정도로 강한 바람. 몸을 움츠리고 눈을 감았다.
꾹 감은 눈꺼풀 위로, 콧등위로 차가운 결정이 떨어졌다. 얼어붙은 피부위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냉기에 눈을 떴다. 눈이, 하이얀 뼛가루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향이 나더니 기어이 눈이 내린다. 올해의 첫 눈이다. 아니, 이번 겨울의 첫 눈이라고 해야겠지. 어찌 되었든 눈을 보는 기분은 나쁘지 않네.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들 사이로 당신이 보였다.
하얗게 흩날리는 뼛가루, 그 뒤로 보이는 당신.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없어보였고, 성스러워보였다. 언뜻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 사이를 걸어오는 당신은 그만큼 비현실적이었고, 아름다웠다.
숨이 막힌다. 이렇게 생기 없는 당신을 보면 나는 숨이 막힌다. 마치 당신이 인간이 아니기라도 한 양, 제 손에 쥘 수 없는 사람인양 숨이 막힌다. 걸음을 차마 내딛지 못한다. 몸이 굳어버린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얼어붙어서, 당신이 내게 사형선고를 내리기라도 할 모습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모양을 감상했다.
당신이 천천히 다가와 저를 끌어안는 그 때까지, 나는 당신이 나도 모르게 떠나버리고 그대로 사라져서 내게 다가오는 꿈을 꾸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언젠가의 기억이 저를 덮쳐온다. 이게 꿈의 기억인지, 현실의 기억인지 확실하지 않아서 저는 말 한 마디 섣불리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끌어안을 때, 당신의 숨결이 내 머리 위를 간질이고 온기가 내 심장에 닿을 때,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나도, 당신도 여기 있다.
“선배,”
“몸이 식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애정을 담고있다. 나는 이렇게 당신의 앞에서 녹아내린다. 아무리 단단하게 얼어있더라도 당신위 앞에만 서면 이렇게 녹아내린다. 당신에게서도 싸한 향기가 난다. 겨울향이 당신에게 깃들어있다. 차갑고 싸늘한, 아름다운 향기가 당신에게서 흘러나온다. 조금 더 당신의 품으로 파고든다. 이러면 내 몸에도 겨울의 향기가 배어들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는 군."
"선배니까요. 보고싶었어요."
"아아. 나도, 보고싶었다."
그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제게는 한없이 따뜻하기만하다. 이리도 상냥한 사람이 얼음 백작이라 불렸다니. 당신의 겨울은 얼마나 차가웠던 걸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감는다. 눈은 세상의 소리를 모두 먹어버리고, 귓가에는 당신의 심장소리만 울린다. 일정하게 울리는 소리에, 안정감이 찾아온다.
"잘 지냈어요?"
"당연한 말을 묻는군. 컨디션의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당신이 없어서 허전했어요."
그는 말 대신 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는다. 그의 말대로, 우언보다는 이 쪽이 더욱 안심이 된다. 로케는 잘 되었나요? 물음에 그는 긍정의 대답을 내놓는다. 떨어져 있는 일이 잦음에도 불구하고, 늘 재회는 애틋하고 이별은 서글프다. 한참을 껴안고 있었을까,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제 들어가요, 피곤하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 발걸음. 죽음과 같은 일상에 생명이 깃든다.
아무렇지 않게 걸쳐주는 당신의 코트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새삼 심장에 닿아 와서, 얼굴을 묻는다. 어느새 눈이 그쳐있다. 흩날리는 뼛가루가 사라지고 당신의 눈동자색이 머리 위를 가득 채운 지금은 당신의 그 모습이 꿈같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건 정말 현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떤가.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당신이 현실인데.
2016.01.?? 첫 업로드
2016.02.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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