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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봄이 오면

admin 2018.11.18 00:57 read.3

  자박자박, 눈 밟는 소리가 조용한 주변을 울렸다. 올해의 첫 눈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많이 내리는 일은 첫 번째다. 이런 날이면 당신이 생각나.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쉰다.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에 산 자의 온기가 만나 안개를 자아낸다. 온통 하얗게 물든 주변을 뿌옇게 물들이고 시야를 가리다, 결국 그 온기를 잃고 스러져간다. 그 모양새가 꽤나 당신을 닮아있다고 느껴서, 한 번 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폐부를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 온기를 잃어가며 스러져가는 숨. 마치 죽음과도 같아.
  뒤를 돌아보면 벌써 발자국이 지워져간다. 무거운 함박눈이 흔적을 지워버리기 시작한다. 이대로 내 존재까지도 덮어버려서, 아무도 찾지 못하게 만들면 좋겠다. 작고 어린 소망이 비죽 고개를 내민다. 그러나 겨울은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 눈은 녹아서 질척하게 변한다. 순백의 눈이 더러워져 질척하게 변해버리면, 제 꼴사나운 모습도 보여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이 함박눈이 모두의 머릿속에 내리면 좋을 텐데. 
버리지 못한 미련이 이 육신을 덮어버리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저를 덮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면 저는 아무런 죄책감도 의무감도 없이 유유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 
  그 날이 오기만 한다면 저는 미련의 사슬을 끊어내고 훨훨 나비처럼 날아오를 텐데. 그 연약함이 눈보라에 휩쓸려 스러져버리기를 바라면서 날아오를 텐데. 하지만 함박눈은 결코 사람들의 머릿속에 내리지 않는다. 모두의 머릿속에 함박눈이 내리는 일은 없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제가 조금 많이 한심해졌다.

  점점 더 험난해지는 길을 뚫고 안으로 향한다. 주변에서 가장 외지고, 험한 곳. 당신이 원했던 자리다. 아니, 내가 원했던 자리인가? 그 때의 기억은 희미하기만 해서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도 떠오르지 않는다. 모두 망각에 지워져 간다. 잊혀지기를 바라는 기억도, 잊혀지지 말아달라 애원하는 기억도. 
  있잖아요, 선배. 점점 당신의 목소리가 희미해져가요. 몇 번이고 방송을 돌려보고 노래를 듣는데, 점점 당신이 내 안에서 녹아가요. 
서럽기만 한 이야기를 작게 속삭였다. 소리를 머금은 눈이 차곡차곡 쌓인다. 제 목소리는 작고 미약해서,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먹혀버린다. 그 사실이 안심된다. 제 한심함을 들을 이는 없다.

  예전에는 이 길을 다닐 때 자주 넘어졌다. 어리지도 않은 나이면서, 넘어졌다는 핑계로 눈물을 쏟아내고는 했다. 더 이상 넘어지면 잡아 줄 손이 없다는 사실이, 무릎을 닦고 저에게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서럽게 소리 내어 울었다. 아주 어릴 때를 빼고 처음으로 낸 울음소리였다. 허나 이곳은 외지기만 했고, 그 누구도 제 울음을 듣지 못했다. 그래도 당신에게는 들렸을까. 차라리 그가 듣고 제게 와준다면 좋았을 텐데. 선배가 제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는 한 번도 들려준 적 없었는데,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니까 너무나 쉽게 나와 버린다. 당신은 나를 너무나 쉽게 휘둘러.

  더욱 험난해진 나무뿌리를 넘어서. 당신이 잠들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둥그렇게,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솟아오른 돌, 유려하게 음각된 글자. 그리고, 눈에 묻혀서 알아보기 힘든 봉분. 그 누구도 찾지 못할 외진 곳에 자리 잡은 당신의 무덤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조용한 죽음을 맞이한, 당신의 무덤이었다. 
  눈에 묻혀 차갑게 얼어붙은 비석. 손을 뻗어 눈을 털어낸다. 붉게 물든 손 끝. 더 이상 잡아 줄 손이 없어서 차갑게 얼어버린 손.
  숨을 들이쉰다. 가슴 속을 얼려버릴 수 있을 만큼 이 곳의 공기가 차가웠으면 좋겠다. 그래서 제 가슴아래에서 요동치는 슬픔을, 절규와 썩어버린 감정들을 모두 차갑게 얼려버렸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그 얼음이 가시투성이라도, 삐쭉삐쭉하더라도 피와 함께 토해낼 텐데. 순백의 눈 위에 붉은 얼음을 토해내고 감정을 지워버릴 텐데. 하지만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 너무나 깊게 타오르고 있어서, 차가운 공기를 데워버렸다. 여전히 온기가 스러지고 있다.

  “선배,”

마치 대  답이 기다리는 모양으로, 저는 말을 멈췄다. 진실로 당신의 대답이 들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당신의 목소리가 가슴속에서 올라와서 귀에 속삭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느낌인데, 다시 울컥했다. 차가운 공기가 시큰해진 눈가를 날카롭게 베고 지나간다.

  “있죠, 선배. 다들 선배를 찾아요. 본국으로 왜 말도 없이 돌아갔냐고, 그렇게 매정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특히 쿠로사키씨가, 저를 걱정했어요. 당신이 떠나고 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 봐요. 매정한 놈이라고 옆에서 한참을 투덜거리기에, 울 뻔 한 거 알아요? 절대 울리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은 어디가고, 쿠로사키씨가 저를 달랬어요. 미안하다고, 자신이 경솔했다고. 그 백작놈은 어디를 가서 제 애인이 우는데 버려두냐면서. 

  “옆에서 고토부키씨가 지나갔어요. 미카제씨도. 선배, 다들 저에게 한 번씩은 물어봤어요. 어디 갔냐고. 선배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말해 버렸을지도 몰라요.”

  모른다고.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기만 한다면 따라갔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 버렸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냥, 당신의 고향을 댔어요. 쇄국정책을 펼치는 곳이라서 저를 데리고 가지 못했다고, 그렇게만 말했어요. 진구지씨가, 바론은 매정하다고 그러더라고요. 쿠로사키씨랑 같이 마스터코스를 했더니 말투도 닮아가나봐요.

  “이 쯤에서 그런 우민들의 이야기 대신 제 이야기를 해 보라거나, 선배에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라거나, 그런 말 해줘야 되잖아요. 왜 듣고만 있어요? 아니, 들리기는 할까요?”

  들리지 않겠죠. 못 듣잖아. 내 목소리가 있을지도 모르는 저승에 닿을 리가 없잖아. 시큰거리던 눈이 기어이 눈물을 토해냈다. 물방울이 온기를 머금고 쌓인 눈에 구멍을 뚫는다. 발치에 구멍이 하나 둘, 늘어난다.

  “카뮤, 어디 있어요?”

  떠나지 않는다면서요. 네가 있어 내 인생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면서요. 왜 그 곳에서 그렇게 외롭게 누워있는거에요? 내가 있는데, 내가 왔는데 왜 눈을 마주해주지 않는거에요? 카뮤, 제발 한 마디라도 해 줘요. 내게 당신이 있다고 딱 한 번만 상기시켜줘요. 내가, 내가 버틸 수 있게 해줘요.

  "거짓말쟁이. 나한테 약속했으면서.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왜 그래요. 왜 나를 버리고 떠나버렸어요. 나는 아직 당신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데, 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아요."

  유치한 말이 떠올라서 입 밖으로 툭 튀어나간다.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닦아내었다. 얼어붙은 손이 눈가의 온기를 빼앗는다. 

  “저는 겨울을 사랑했어요. 당신이 태어난 날도, 당신의 향기도, 제 삶에 행복이 깃든 날도 모두 겨울이니까. 제가 말한 적 있던가요? 겨울은 안식의 계절이에요.”

  그런데, 오늘따라 지독히도 외롭게 느껴져요. 살면서 처음으로 봄을 기다려봤어요. 처음이에요, 처음이라고요. 이런 처음 필요 없는데, 어쩔거예요. 당신이 나를 이렇게나 바꾸어 놓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도망가 버리면 저보고 어쩌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하나도. 

  “꽃 피는 봄이 오면, 당신의 무덤에도 꽃이 피어날까요?”

  여전히 대답은 없다. 어깨가 축축이 젖어갈 때까지 기다렸지만 눈이 쌓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당신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내일 올게요. 또 봐요. 

  거칠고 험한 길을 혼자 내려간다. 혼자라는 무게가 이렇게나 험하게, 무겁게 느껴진 적이 있었을까. 지친 다리는 점점 힘이 풀리고, 거친 나무 뿌리는 계속 발목을 잡는다. 눈물로 흐려진 눈이 앞을 보지 못한다. 
  발목이 끼여서, 결국 넘어져 버렸다. 처참하고 볼품없게 눈 위를 구른다. 애써 다듬은 머리는 눈에 젖어들고, 옷은 엉망으로 변한다. 구르면서 돌에 찍힌 다리는 욱신거리고, 등은 아프다. 아프다. 그저 아프고 서럽다. 더 이상 손을 뻗어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영영 혼자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이 아프고 서럽다.
  눈물이 흐른다, 눈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서러움이 올라온다. 목 아래를 꽉 틀어막은 덩어리를 뱉어내려고, 절규하듯 오열한다. 입에서 흘러 나오는 울음 소리가 낯설다. 남의 울음 소리인 양 듣고 있건만, 서러움은 사라지질 않는다. 닿지 못할 원망이 처절하게 부서져 나간다.

  "선배의, 선배의 무덤에는 꽃이 피겠죠. 선배, 선배가 꽃을 품고 있을텐데. 저는 왜 꽃을 피우지 못할까요? 어째서 제 겨울의 끝은 오지 않을까요?"

  제발, 대답해줘요. 대답해줘, 카뮤. 울부짖음이 눈으로 덮인 산에 울린다. 볼품없이 널브러진 몸 위로 눈이 쌓인다. 이대로 잠들면, 당신 곁으로 갈 수 있을까. 그러면 잠들 수 있는데. 이 추위 속에서, 아무도 찾지 못하게 잠들 수 있는데. 당신이 화내도 괜찮아. 그래도 언젠가 나를 안아 줄거라는 사실을 아니까. 
  내일 간다고 말했지만, 사실 갈 자신이 없어요. 그 차가운 현실을 다시 마주 할 자신이 없어.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다시 자각하고 싶지 않아요. 늘 그래, 내가 사랑한 사람은 떠나가 버려요. 가족도, 연인도 전부. 제 봄날은 늘 너무 빠르게 지나가요. 

  "제발, 카뮤. 제 꽃피는 봄날은 올까요?"

  따라오지 않는 대답. 몸 위로 서서히 쌓여가는 눈. 나는 이대로 영영 겨울에 멈춰버릴 것만 같아. 


2016.01.02 첫 업로드
2016.02.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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