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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잔상

admin 2018.11.18 00:57 read.2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이다. 겨울은 한가득 한기를 품은 바람을 불어대고, 연인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기 위해서 서로의 거리를 좁힌다. 
거리의 연인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연인이 있다. 서로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걸어가는 연인. 다른 이들이 서로의 온기를 갈구하며 닿으려 애쓰고 있는데 반해, 그들은 거리를 좁히지 않는다. 서로에게 닿으려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 
  어느 상점에서 틀었는지 모르는 은은한 노래가 흐르고, 남자와 소녀는 웃음 짓는다. 소녀도, 남자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옅은 미소만을 짓고 있다. 그러나 그 웃음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모두 홀린 듯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아이돌 아냐? 
  맞는 거 같은데? 
  찍자! 
 순식간에 소란으로 가득 찬 거리에서 그들은 초연하다. 주변의 소음과 환경에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고 그저 제 길을 걸어간다. 누구 하나 옆을 보거나 다른 이들에게 팬 서비스라도 하는 이 없다. 그저 일상처럼 받아 들이며,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소녀와 남자는 대화 속에서 감정을 나눈다. 당신에 대한 사랑과 행복을, 그리움을 속삭인다. 당신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사랑하는지 호소하는 언어로 그들은 대화하고 있다. 연인들의 대화에서 으레 나오곤 하는 미래에 대한 주제는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다.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지 않다면 이럴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 있다. 그저 현재와 과거만을 논하는 대화.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대화가 어색함 없이 이어진다.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거리. 그들의 대화에서도 딱 그만큼의 거리감이 느껴지고 있다. 그저 현재와 함께 한 과거에 집중 된 대화는 일상과 같은 소소한 이야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고귀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만, 완벽하고 빛나는 이야기만 존재한다. 그럼에도 소녀도 남자도 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어쩌면 의식적으로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는지도 모르지. 그저 그들은 평범한 일상을 서로에게 속삭인다. 

  "선배, 슬픈 꿈을 꾸었어요. 선배가 날 버리고 저 멀리 떠나는 꿈."

  소녀가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를 사랑함을 알고서도 그런 말을 하나."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정말 그랬는걸요, 선배. 
  소녀가 말했다. 
  네가 꿈에서도 나를 못 믿을 만큼 믿음을 주지 못했나보군. 
  남자가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선배가 저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소녀가 대답했다. 
  그러면 문제없다. 
  남자가 다시 대답했다. 
  하지만요, 선배. 이 사실도 꼭 알고 있어야 해요. 
  소녀가 말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여운을 남기며 소녀가 앞으로 나아간다. 대화를 중단하고 벌이는 소녀의 기행에 의문을 품을 만도 하건만, 남자는 그저 소녀를 바라보았다.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감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소녀를 그저 바라본다. 
  소녀는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남자의 길을 막는다. 뒤돌아서서는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한다.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색이라고 생각되는 색의 눈이, 두 가지 색이 섞인 눈이 남자를 마주한다. 남자는 소녀의 눈이 일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잔뜩 뜸을 들인 소녀의 입술이 벌어진다.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랑해요, 크리스자드."

  소녀가 그 모습에 어울리는 미소를 짓는다. 기이할 정도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던 소녀가 처음으로 그 나이대의 아이로 보인다. 남자는 그 경이로운 광경을 눈에 똑똑히 담으려 노력한다. 소녀의 눈에서 마알간 웃음이 뚝뚝 떨어진다. 반쯤 접힌 눈, 눈초리가 아래를 향하고 입 꼬리는 위를 향한다. 천진난만해 보인다. 그리고 슬퍼 보인다. 
  소녀는 웃음으로 울고 있었다. 그리도 아름다운, 행복해 보이는 미소로 울고 있다. 이질감 가득한 저 미소는 첫 미소다. 남자에게 보여준 첫 미소였다. 남자는 그 미소에 드디어 저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숨이 막힌다. 이 세상의 모습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성스럽기까지 한 모습이라 카뮤는 눈을 감았다. 영혼에 그 모습을 새기듯 눈을 꾹 감았다. 눈꺼풀 뒤의 어둠위에 소녀의 모습을,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리려고 노력한다. 마침내 소녀의 모습이 영혼위에 덧그려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카뮤는 다시 눈을 떴다. 그의 아름다운 연인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잔잔한 노래의 여운이 카뮤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녀의 노래였다. 

  "지독하군."

  크리스자드라는 이름을 받았던 카뮤가 말했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제 갈 길을 간다. 아무런 미련도 없는 모습으로, 잔인할 정도로 단호하게 소녀가 서 있던 길을 지나친다. 
  그는 이 길을 걷는 내내 혼자였다. 그저 그의 외로움이 그에게 환상을 선사했을 뿐이다. 어쩌면 카뮤를 어엿비 여기는 뮤즈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그녀가 환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완벽해 보이는 모습이라도, 환상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일은 없다.
  소녀의 노래를 들으면 언제든 다시 소녀는 나타나서 그에게 사랑을 속삭이겠지.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던 그 첫 미소를 지으며 제 이름을 부르겠지. 카뮤는 그런 이유로 그녀가 제게 선물한 노래를 듣지 못했다. 그에게 환상은 그저 지독한 독이고 마약이었으니까. 이미 존재하지 않는 이를 다시 바라봐 무엇하겠는가. 그저 괴로울 뿐인데.

  소녀는 카뮤에게 실로 많은 처음을 선물했다. 첫 사랑, 첫 미소, 첫 키스, 처음으로 꿈꾼 미래, 그리고 첫 이별. 처음으로 경험한 무력감, 절망. 카뮤는 소녀에게서 너무나 많은 처음을 받아 괴로웠다. 소녀는 그의 미래고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연약했다. 아니, 약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카뮤의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웃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 모습이 그의 영혼위에 그려졌나 보다. 그러지 않으면 이토록 선명하게 남아있을 리 없다. 
  소녀가 사라지고 나서, 그의 앞에 죽어버린 모습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는 소녀의 미소를 보았다.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노래와 함께 사랑을 속삭이고는 마지막으로 말했던 그 말을 속삭인다. 숨 막히는 미소로 속삭이고는 한 여름의 아지랑이와 같이 사라진다. 그는 사막의 신기루를 보는 느낌이었다.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는 오아시스와 같았다. 그는 그 미소를 매번 영혼위에 새기며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소녀는 노래 부르고 있을 거라고. 언젠가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나서 웃을 거라고.
  그러나 그의 고귀한 영혼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소녀는 죽었다.


2015.11.04 첫 업로드
2016.02.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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