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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남겨짐

admin 2018.11.18 00:53 read.2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세상을 잃은 소녀는 펜을 들고 고민했다. 늘 바라보던 오선보를 앞에 두고 음을 그려 넣기 위해, 누군가에게 할 이야기를 찾아내기 위해. 허나 그 종이 위에 쓰여질 이야기는 탄생하지 못한다. 소녀의 생에서 할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은 탓이다.
결국 소녀는 펜을 내려놓는다. 악기를 잡으려 손을 뻗지만, 잘게 떨리는 손은 그 어떤 악기도 연주 할 수 없다. 아무리 진정시키려 애를 써도 손의 떨림은 잦아들지 않고, 결국 소녀는 그 사랑하던 바이올린조차 손에 쥐지 못하고 연습실의 불을 끈다.

여전히 하늘은 맑다. 밖에 나가볼까. 꽃도 준비하고. 이런 날은 보통 차를 마시고는 했지만 우려낼 자신이 없다. 요즘은 어떤 차를 마시려고 해도 짜기만 해서. 찻잎도 사둔게 없고. 소녀는 투덜거리며 나갈 채비를 했다. 겨울바람은 꽤나 매서워서 그냥 나갔다가는 고생하겠지만, 소녀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리 두껍지 않은 코트를 걸치고, 단추를 여민다. 목도리를 두르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소녀임에도,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목도리를 두르게 만든다. 습관처럼 장갑 없이 나가려던 소녀가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아, 되돌아와서는 다시 장갑을 손에 낀다. 이제 준비 끝. 작은 중얼거림이 공허하게 울린다. 
택시를 타면 빠르겠지만 그녀는 굳이 도보로 움직이는 방법을 택한다. 자주 그 곳으로 걸어다니던 소녀였기에,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혼자 걷는 일을 좋아하지 않던 소녀가 혼자 걷기로 결심한 일은 좀 의외라고, 생각한다. 또각또각, 하이힐이 보도블럭과 부딪히며 제 존재감을 어필한다. 그 하이힐 위에 올라탄 소녀는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무표정을 유지한다. 빨라지지도 느려지지도 않는 일정한 걸음이 유지된다. 화려한 거리의 색 속에서 소녀는 여전히 무채색이다.
한참을 걷던 소녀는 붉은 빛의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선다. 따라갈까? 작은 생각이 자라난다. 소녀는 잠시 진지하게 그 가능성을 고민한다. 차들은 쌩쌩 바람소리를 내며 소녀 앞을 지나치고, 소녀는 그 사이에 뛰어 들 타이밍을 잰다. 
그만두자.
작은 중얼거림이 바람소리에 묻힌다. 아픈건 손목으로 충분해. 이기적인 겁쟁이의 말이 울린다. 육체의 고통은 손목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다시 머릿속에서 날뛴다. 신호등에 푸른 불이 들어온다. 사람 속에 섞여든다. 
길을 건너는 도중, 소녀는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준다. 상처투성이의 너덜너덜한 손목을 힘겹게 가리고 있는 천이 축축하게 젖어든다. 날카로운 고통에 소녀의 정신은 다시 차가운 크리스탈 처럼 말끔해진다. 나중에, 돌아가서 붕대랑 거즈 갈아야지. 작게 다짐한다. 그 다짐이 얼마나 허망하게 흩어질지 그녀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헛된 다짐을 한다. 누군가를 안심시키던 버릇을 버리지 못한 과거의 잔해. 
단조로운 흰색과 검은색의 반복에서 소녀의 추억이 떠오른다. 심장에서 뻗어나온 추억조각이 머리에 닿는다. 예전에, 소녀가 아직 더 어린 소녀였을 때. 그녀는 이 길에서 넘어졌던 기억이 있다. 그대로 굽이 부러진 하이힐에 난감해하던 그녀를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들어 올리던 연인은 얼마나 밝게 빛났던지. 역광에 보이지 않던 표정이지만, 소녀는 능히 그의 얼굴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있었다. 그 때 선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소녀는 진실을 떠올리고는 숨이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니, 그녀의 기도는 실제로 진실에 틀어막혀진다. 
그가 그 때 어떤 표정을 했지? 어떤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지? 어떻게? 언제? 무슨 얼굴로? 맹세의 언어가 흐려지고, 단어가 흐려져 색만 남는다. 소녀는 주체할 수 없이 흘러드는 냉기에 얼어붙는다. 

빠앙!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천둥처럼 귓전을 때린다. 소녀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다. 신호등은 이미 붉은 빛을 켜고있다. 
소녀는 급히 다리를 놀려 길 위에서 벗어난다. 그녀가 사라진 도로 위에는 다시 바쁜 차들이 지나다닌다. 그대로 날 쳐 버리지, 왜 현실로 끌어들였을까. 작은 혼잣말이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하고 사라진다. 아직 갈 길은 한참 남았음에도 이미 소녀는 지쳐있다. 허나 소녀는 근래에 지쳐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덕에 그녀는 피로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이 이미 새삼스러울 이유가 없으니. 
사람은 일정 이상의 충격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방어기재가 있다고 한다. 부서지지 않기 위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보여주는. 그렇게 된다면 미치는 일과 다르지 않지만, 적어도 그 자신은 행복하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미쳐버렸으면 좋았는데. 소녀는 제가 그를 위해 미쳐버릴 정도로 좋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조소한다. 머저리. 씹어뱉듯 중얼거리는 말의 어감이 날카롭다. 
무의식적으로 뒤에 따라올 말을 기다리다가, 이질적인 침묵에 소녀는 현실을 다시 깨닫는다. 참을 수 없는 조소가 다시 튀어나온다. 험한 말을 한다는 이유로 저를 책할 사람은 이미 이 곳에 없다. 혼자 나온 주제에 그런 말을 기다리던 저도, 저도 꽤 입이 험했으면서 제게 그리 말하던 그도 웃기다. 모두 우습다. 우스운 세상이라고, 그리 소녀는 독백한다. 

하늘은 지독할 정도로 맑다. 싸늘한 겨울 하늘은 높다. 높고 연한 색을 품은 하늘에, 소녀는 괜히 기분이 나빠진다. 어디 구름 좀 안 끼나? 맑은 날을 좋아했던 그녀였으나, 날카로운 심기에 무어가 좋아 보일까. 
본디 연습을 하거나 작곡을 해야 할 시간임에도, 소녀는 밖으로 나오는 일에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이미 음악에 대한 열의는 그녀의 뮤즈와 함께 사라져 버린 탓이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는 몸이 되고, 악상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아직 그녀는 작곡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그 이름이 그와 그녀를 잇던 선이라 차마 내치지 못한다. 사랑은 이리도 구질구질하게 사람을 옭아맨다. 

칼라로 이루어진 꽃다발을 하나 산다. 수 많은 꽃말을 알고 있지만, 그녀는 많은 꽃말 중에서 하나를 가장 좋아했다. '천년의 사랑.' 그녀의 그가 사랑을 맹세할 때 썼던 꽃말이다. 
그가 그 꽃다발을 좋아할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그녀는 꽃다발을 준비한다. 무채색의 일상에서 꽃이라는 화려한 유채색은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손에 든 꽃다발과 지독히도 잘 어우러진다. 마치 처음부터 그녀를 위한 꽃다발이었던 양.
그녀는 본디 제 손으로 꽃을 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 제 손으로 꽃을 사는 일이 익숙해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더라. 작은 허탈한 말과 함께 뒤를 돌아본다. 그만큼 덧없고 부질없는 행동이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질릴만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저절로 과거로 흘러가는 생각을 붙잡지 못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지독하게 목을 조여온다. 
아, 해이해졌어. 소녀는 작게 독백하고 앞으로 걸어간다. 을씨년스러운 장소가 그녀를 반긴다. 

며칠 전에 눈이 내렸다더니 아직도 녹지 않았네. 소녀는 그리 중얼거리며 둥근 돌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옆에 쌓인 눈에도 주저하지 않고 돗자리를 깐다. 분명 차가울게 분명함에도 그 위에 주저앉는다. 익숙한 몸짓으로 자세를 잡고, 돌에 기댄다. 냉기가 온 몸으로 흘러 들어간다. 어쩐지 그 냉기가 너무나 차갑게 느껴져서, 소녀는 괜히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차가운데 앉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 댔으면서, 다시 한 번만 해줘요. 왜 필요할 때는 안 해주고 그래요. 
투덜거리며 소녀는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주먹 쥔 손에 쥐어져 나오는 사탕과 각설탕들 몇 개. 꿀이 담긴 작은 병과 연유가 담긴 작은 병. 꽃다발을 소중하게 돌 앞에 내려둔 그녀는 그 옆에 모든 물건들을 우르르 쏟아놓는다. 어색하게 냉기를 피했던 자세를 고쳐 소녀는 편하게 돌에 기댄다. 누가 보면 욕할 장면이지만, 소녀는 개의치 않는다. 아니, 그 행동에 모욕을 느낄 사람이 없다. 그녀의 그는 이 곳에 친척 하나 없으니, 분명 그녀가 아니었다면 관리 해 주는 이 하나 없이 잊혀갔겠지. 

"진짜 나 두고 먼저 갈 줄은 몰랐어요 물론 선배가 저보다 5살이 많기는 했지만, 우리같이 젊은 나이에 그게 뭐 중요한가요? 선배나 나나 죽음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니까, 50년 쯤 지나서 걱정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부분에서 소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애써 아무렇지 않게 목소리를 고르고, 떨리는 감정을 숨긴다. 그럼에도 물방울은 긴 궤적을 그리면서 차갑게 얼어붙은 피부 위를 쓸고 지나간다. 제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생각하며 소녀는 가만히 숨을 쉬는 일에 집중한다. 이리도 약해진 제가 한심하다. 그리 독백하며 소녀는 다시 말을 잇는다.

"오늘 나올 때는 장갑을 까먹을 뻔 했어요, 이제 손이 얼지 않게 잡아 줄 선배도 없는데. 원래 장갑은 안 좋아해서, 잘 안해요. 그건 악기 하고 생긴 버릇이니까, 악기 쉬면서 없어졌죠. 아, 그래도 오늘 끼고 나온 가죽장갑, 선배가 선물했던 그거에요. 안 끼고 다닌다고 은근히 섭섭해 하더니. 이제 끼고 나왔으니까 만족하죠?"

말하기가 힘겨운 듯, 소녀는 다시 말을 고른다. 앞에서 울면 또 싫어할 거야.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허망하다. 이제 봐 주지도 못하면서, 섭섭해 하는 모습만 남기면 어쩌자는 거예요, 선배. 슬픔을 감추지 못하던 소녀는, 애써 밝은 미소로 감정을 덮는다.

"저는 단맛 좋아하는데, 선배가 좋아해서. 그래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건데, 아직도 있더라고요. 원래 선배 주려고 했던 거니까 다 가지고 왔어요. 놔두고 갈게요. 꽃은 매일 선물 받기만 하다보니까 뭘 줘야할 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선배가 줬던 걸로 사 왔어요. "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가, 더 이상 이럴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제 말에 반응해 주던 이는 더이상 반응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이런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소녀는 제가 참 부질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으로 조금 더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다. 온기가 몸 안에서 돌고 있음을 느끼며, 소녀는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혼자 놔두다니, 원망해도 되죠?"

이내 고개를 아래로 숙여버린 소녀의 웅얼거림이 차가운 주변을 울렸다. 외로워요, 선배. 그녀가 기댄 비석에 목소리가 닿아 떨린다. Cryszard.R.Camus. 유려한 필기체로 그리 적혀있었다. 고개를 든 소녀가 조용히 말했다.

"아무런 감흥이 없어요. 바이올린은 쉰 지 너무 오래돼서 손이 굳어버렸고, 악상도 떠오르지 않아요. 오선보에 그릴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선배, 나의 뮤즈. 내가 당신을 따라갈 수 있게 허락해 줘요."

소녀는, 한참을 대답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허나 한참을 지나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정적이 주변을 채우고 있다. 그제야 소녀는 일어서 툭툭 눈을 털어내고 돗자리를 접는다. 떠날 채비를 모두 마치고 등을 돌린다. 

"또 올게요."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워. 소녀는 그리 생각하며 길을 걷는다.

2015.08.09 첫 업로드
2015.02.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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