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다름없는 날이다. 으레 해 오던 일이니 별 감정도 없이 하던 일인데, 오늘따라 왜 이리 지겨운지. 멍하니 천장의 타일들을 세다 흘끗, 내어놓은 바이올린을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방금 잡은 바이올린을 다시 접어 넣기도 좀 그런데. 그런데 정말 하기 싫어. 쉬면 손 굳는데. 야외에서 해 볼까. 초점없는 눈이 주변을 살핀다. 한참을 그렇게 눈만 데록데록 굴리고 있었을까, 반쯤 누운 자세로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래, 나가자.
소중하게 품에 안은 악기,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름 특유의 냄새가 나는 공기가 저를 감싸안고, 하늘에 펼쳐진 장관이 압도한다. 와아, 작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아, 이러려고 올라온거 아니었지.
악보도, 악보를 받칠 물건도 들고오지 않았다. 뭐, 별로 상관없지만. 오선보 위를 벗어났다 하여 소리가 사라질 리가 없다. 악보가 없다면 만들면 되는거지. 텅 빈 공기를 청중 삼아, 하늘에 펼쳐진 별을 악보삼아, 연주를 시작한다.
여름 밤 위에 풍성하게 소리가 올라가고, 저는 손가락과 활로 소리를 다룬다. 소리는 악기를 따라 몸으로 흐르고, 이 순간 악기와 몸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손가락과 팔을 타고 흐르는 진동이 선명하다. 통통 튀는 음을 잡아내고, 길게 늘어지는 음을 흔든다. 크레센도, 포르테, 포르티시모. 격양되는 감정을 따라 셈여림도, 음도 달라진다. 격정적으로 움직였던 활, 데크레센도. 서서히 잦아드는 소리. 마지막 비브라토가 떨림을 남긴다. 녹음은 제대로 되었을까?
도시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 덕일까, 하늘을 별이 수놓고 있다. 저게 베가, 알타이르. 카시오페이아는 여기서 안보이나? 목을 꺾어 위를 바라보고 있으니 목이 아파온다. 은하수 보이는데, 조금만 더 볼까. 악기를 잘 치워두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제 조금 낫네. 검은 캔버스 위에 흩뿌려진 은가루처럼, 검은 종이에 구멍을 뚫어 빛을 비추는 양. 늘 밤하늘은 영감의 근원이요, 가사의 일부다. 더 많은 별을 한 번에 보고 싶어. 조금씩, 조금씩 시야를 넓히려고 뒤로 향하는 몸.
아,
털썩, 중심을 잃은 몸이 뒤로 넘어갔다. 손 잘못 짚지 않았지? 손목을 돌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지만 아픈 곳은 없다. 뭐, 그럼 신경 안써도 되겠네. 조금 빨라진 심장을 진정시키며 시야를 가득 채운 별을 바라봤다. 거짓말처럼, 정말 거짓말처럼 일상에서 벗어난 풍경이다. 옆으로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늘 보던 그 곳인데, 그 위를 덮은 하늘만큼은 그려낸 모습 같아서. 기분이 조금, 아주 조금 이상하다. 손을 뻗으면 내 손도 그림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늘에 닿기를 바라면서 있는 힘껏 손을 뻗어 올린다. 하지만, 저 별들은 너무 높은 곳에서 빛나고 나는 정말 낮은 곳에서 숨 쉬고 있어서, 별빛의 한 조각도 그러쥘 수 없었다. 내 손은 늘 봐오던 그 손이고, 그 사이로 보이는 별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손도 같이 반짝이면 좋겠는다. 저도 반짝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떠올렸다가, 포기했다. 저 위에서 자신을 불태워 빛을 내고 있는 별과, 모두 타 버린 흔적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끼이익, 기름칠을 충분히 하지 않은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 흘끗, 바라본 신발은 정갈한 구두. 그다. 내 빛, 나의 별.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다 들리지 않자 걱정되어 올라온 게 아닐까, 조금 이기적인 생각을 해 보면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늘 저보다 조금 따뜻하던 손은 여전히 조금 높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건 내가 밖에 오래 있어서 몸이 식은 걸까? 그가 제 손을 만지고는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니 맞다. 표정펴요, 선배. 작은 말을 건낸다.
겉에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허리를 숙인다. 바닥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몸 위에 그의 상의가 덮인다.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보여주는 이런 상냥함에 늘 새삼 반해버린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낮의 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웃어 보인다. 제 눈동자가 꼭 밤하늘을 닮았다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는 당신의 눈동자는 꼭 낮을 옮겨놓은 눈동자예요. 화려한 백금발도, 푸르른 눈동자도, 꼭 낮과 같다. 제가 밤이라면 그가 낮이다. 나의 태양, 나의 빛. 제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실을 모르는 그는 걱정스러운 말을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쯧, 조금 더 몸을 소중히 여겨라."
“알았어요. 별로 많이 춥지도 않은걸요.”
꾸짖는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본다.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하면서도 재킷이 조금 더 따뜻할 수 있게 여며주는 그 상냥함이 너무 좋아서,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선배, 별이 많이 떴어요. 평소엔 잘 안 보이는데, 오늘은 유난히 밝고 선명하다니까요. 같이 볼래요?"
가볍게 옆자리를 탁탁, 쳐 보았다. 누우면 잘 보여요. 늘 귀족적이고 고고한 선배가 이런데 잘 안 눕는거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같이 보면 좋을 텐데. 길게 나올 말들을 모두 꾹꾹 눌러담고, 그저 웃는다. 강요하고 싶지도 않아. 그저 당신이 이 아름다움을 공유했으면 좋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돗자리라도 챙겨올걸 그랬다. 작은 아쉬움이 비죽 올라왔다 내려간다.
털썩, 그가 바닥에 주저 앉는다.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에 숨기기 어려운 놀람이 서렸다가, 사라진다. 내게 이리 약해서 어찌해요, 선배. 작은 웃음을 흘린다. 흘러내리는 저보다 긴, 결 좋은 머리카락이 아름답다. 달빛 아래 당신은 가장 아름다워. 당신도, 하늘도 참 아름다워. 행복하다. 꿈결같은 기분에 젖어든다.
아름답지 않아요?
우문임을 알면서도 불쑥, 내뱉는다. 이러고 있으면 내가 지구에 있는지, 다른 곳에 있는지 헷갈려요. 마치 당신의 노래를 들을 때와 같이요, 선배. 그런 기분을 알까요? 당신은. 모든 물음을 삼키고 당신을 바라본다. 눈이 마주친다.
"아름답다."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누운 상태에서도 고개를 살짝 갸웃, 해 보았다. 당신이 내뱉은 말은 분명 문맥을 보았을 때는 별이 아름답다는 말인데, 어째서 그 말이 내게 하는 말처럼 들리는 걸까. 빤히 바라보아도 그의 눈동자에서 떨림 따위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서, 결국 제가 먼저 시선을 돌려버렸다. 대답해 주지 않을거라면, 기다리지 뭐. 어김없이 하늘을 가득 채우는 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사막에 가고 싶어요. 한 밤중에, 불빛하나 없는 사막에서. 쏟아질 것 같이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고 싶어요."
뜬금없는 말에 그의 시선이 저를 향한다. 그럼에도 말을 멈추고 싶지는 않아, 조곤조곤. 달밤에 흩어질 단어들을 풀어놓는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아, 그러고 보니 아이지마씨가 사막출신이라고 했죠? 부탁해볼까요. 여상스레 중얼거리자니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진다. 조금 더 차가워진 시선.
얼굴 펴요 선배.
그에게 다시 한 번 작게 중얼거리며 손을 잡는다. 여전히 따뜻한 손. 상냥한 마음 만큼이나 따뜻한 손이다. 그는 분명 고국의 오로라가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예전에 고국의 오로라라며 일본의 하늘에 빛을 펼쳐보였을 때는 정말, 정말 아름다웠다. 빛의 너울이 일렁거리며 만들어 내는 춤은, 정말 황홀할 정도여서. 그가 그 풍경을 저에게 보여주려 가져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감동적이어서. 제가 그리 자랑하던 단어들을 잃어버렸다. 정말, 당신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어요.
"선배와 있으면 동화 속에 사는 느낌이 들어요."
백작이라는 말도, 여왕도, 그 마법까지도. 선배는 나를 동화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요. 굳어버린 세계에 찾아온 얼음 백작님. 그 노래의 색으로 제 세계를 물들여버렸어요. 당신은 아나요? 당신이 제게 삶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죽으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이미 죽어있는 사람이 다시 죽으려고 할리가 없잖아요. 내 삶의 두 번째 의미. 당신이 마지막은 아니겠지. 그럼에도, 당신이 내게 정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나의 백작님.
"저는 선배의 그런 면을 사랑해요."
있는 힘껏, 환히 웃어보였다. 흐릿한 달빛아래 보일지 모르겠지만.
"선배가 더 이상 백작이 아니라도 좋아요, 그러면 당신은 나를 위해 빠져나온 왕자님이 되는 거니까요. 선배가 보통의 사람이었더라도, 그렇게 된다고 해도, 당신이 제 왕자님이었다는 사실은, 제가 선배 덕분에 색을 되찾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선배의 그런 면이, 그 상냥함이 정말 좋아요."
사실, 선배라면 다 좋지만. 작게 덧붙이며 웃어보였다. 아아, 답지 않게 감상적으로 변한 기분이야. 저 멀리서 찰랑거리는 파도소리 탓일까? 아니면 오늘따라 하늘을 뒤덮은 별 탓일까. 유난히도 몽환적인 기분이 든다.
2015.08.02 첫 업로드
2016.02.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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