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톡, 토도독. 툭, 투두둑.
점점 거세지는 빗소리, 뛰어갈지 고민하는 한여름.
이미 주변은 어둑어둑하다. 하늘은 회색으로 물들어서 제 색을 찾기 힘들고, 물소리로 가득 찬 귀는 습기에 조금 멍하다. 오늘 소나기가 내린다는 말은 못 들은 것 같은데. 작은 투덜거림은 결국 빗소리에 묻혀 사라진다. 발치에 튀어오르는 물방울, 신발은 젖어드는데. 답은 보이질 않네, 저 너머는 보이질 않네.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리듬을 탄다. 음악, 음률. 아마 최초의 음악은 자연에서 탄생했겠지. 흘러드는 악상을 굳이 막지 않는다.
지금이야 여기서 비를 피하고 있지만, 비가 그칠 때까지 쭉 서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어쩌지? 제 시간에 돌아가지 않으면 걱정할거야. 야속하게도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지고, 툭, 툭, 토도독. 경쾌한 물소리도 마음을 달래주지 못한다. 어쩌지? 원망스러울 정도로 세차게 흐르는 비는 몇 번이고 몸을 던진다. 첫 번째 물방울은 터져나가고, 두 번째 물방울은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너도 사랑을 하니?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어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니?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든다. 여기서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떠오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슬프게도 세상은 그렇게 변죽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고, 나는 빗소리에 맞춰 얼마간 흥얼거렸을 뿐이다. 비는 그치지 않아, 그치지 않아.
저 울창한 수목을 보고 있으면 그저 답답하다. 아무도 없는 탑에 혼자 사는 나의 님. 이 비 속에서 숲을 뚫고 갈 길이 없네. 비야, 그쳐주련? 하늘을 쳐다봐도 푸르러지는 일은 없다. 그저, 칙칙한 회색 빛이 정신없이 물을 토해내고 있을 뿐. 이대로 젖어서 도착하면 집을 더럽히게 될 텐데. 딱히 바닥이 더러워지는 걸 신경쓰는 성정은 아니지만 카펫이 물에 젖는건 그리 유쾌하지 않다. 우산을, 챙겼어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핸드폰은 이미 방전된지 오래다. 무언가 짐을 많이 들고 다니는건 취향이 아니라서 카드와 핸드폰만 들고 나왔던걸 후회해야 하나. 절로 찌푸려지는 표정을 억지로 단단하게 유지한다. 여기서 더 늦으면 걱정할텐데. 의심을 걱정하지 않을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은 기꺼웠으나 어딘가 과보호하는 기색이 있는 제 선배를 걱정하게 만드는 것도 퍽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역시, 이 비를 맞고 뛰는 수 밖에 없나.
저 정도로 빽빽한 나무 속이면 그렇게 젖지는 않겠지. 낙관적인 마음으로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송곳처럼 온 몸을 찌르는 빗방울. 전신이 두드려맞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냉수는 전신을 타고 흐르며 미적지근하게 변하고, 머리카락은 뺨에 달라붙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길은 멀기만 하고, 비는 여전히 세차고. 볕이 들지 않는 숲의 그늘은 밤보다 어둡다.
손이 곱아들고 몸이 떨리기 시작할 무렵, 나뭇잎의 그늘 사이에서 시선이 느껴진다는 착각이 든다. 누군가 나를 지켜 보고 있다는 불안, 시야가 가려진 인간이 으레 느끼곤 하는 초조함. 파르바네는 차가워진 손으로 몇 번이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가려져있던 얼굴이 드러나면서 시원해지는 느낌. 그래도 시야의 사각 어딘가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을 떨칠 수 없다. 서둘러야지.
높은 굽의 신발이 빗길에 미끄러지는 건 순식간이다. 잘못 밟은 나무 뿌리, 무너지는 균형. 앗 하는 순간 몸은 앞으로 쓰러지고, 정신을 차려보면 축축한 땅 위를 나뒹굴고 있다. 한 순간 짜증이 솟구친다. 이미 축축해진 신발은 발을 무겁게 만들 뿐이고, 한 번 넘어진 지금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차마 내뱉지 못하는 험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엉키고, 불쾌함을 드러낼 수 있는 건 표정 뿐이다.
짜증나!
결국 발악처럼 집어던진 신발은 나무등치에 맞고 반대쪽으로 튕겨나간다. 여전히 기세좋게 쏟아져내리는 비가 머리 꼭대기를 두드리고, 나뭇잎 너머로 흘러내린 물들이 뺨을 기어다닌다. 씩씩거리는 숨, 한 순간의 침묵. 일정하게 이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화를 내고 있는 저는 우스워 보일 뿐이다. 빠르게 뛰던 심장 박동이 제 자리로 돌아왔을 때, 파르바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가 내던진 신발을 주워들었다. 꼴사나워, 투덜거림처럼 자조하고, 이미 젖어버린 신발을 신을 생각도 들지 않아서 조용히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정신 사나워, 시끄러워, 짜증나, 추워. 이리저리 늘어놓는 불평이 빗소리에 섞여서 흐트러진다. 끈질기게 반복되는 악상. 바닥에 처박혔던 기분이 빗소리를 따라서 조금 나아질 즈음에는 자조적인 생각이 여럿 지나간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음악을 좋아하는 건 사실인가봐. 맨발이 쓸고 지나가는 작은 흙알갱이의 감촉과 비에 젖은 돌이 날카롭게 발을 찌르는 순간. 여전히 하늘은 흐리고, 숲 속은 자욱하고, 길은 멀다. 이렇게 영원히, 널 향해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텐데.
서서히 발 끝의 감각이 사라지고, 붉게 얼어버린 손발을 녹여야할지 고민할 즈음, 희미하게 안개 너머의 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님은 어째서 사는 곳도 평범하질 못한지. 작게 웃을 생각이었지만 잠겨든 목에서 제대로 소리가 날 리 없다. 감기에, 걸릴 것 같은데.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쓸어내린다. 아니면 뭐, 그냥 비가 타고 흘렀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볼 사람도 없는데 어깨를 으쓱이고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굳은 손이 헛돌기를 여러 번,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다녀왔습니다.”
“아아, 예정보다 꽤 늦─”
마침 들어온 참이었는지 계단에서 이 쪽을 바라본 선배는 그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확실히,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젖겠네. 고개를 숙여 머리에서 물을 짜내려는 순간, 큰 보폭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선배가 나를 안아들었다.
“어째서 이런 꼴을 하고 있나! 아무리 여름이라고 하여도, 꽤나 추운 날이다. 감기라도 걸렸다가 어쩌려고!”
“안 그래도, 걸릴 것 같아요. 난감하네…….”
“그 정도로 끝날 일인가! 프로씩이나 된 녀석이, 컨디션 관리는 기본이지 않나! 연락이라도 했으면 데리러 갔을 것을!”
“소리지르지 마요.”
그 한 마디에 입을 다무는 것이 선배 답다고 할 수 있지만, 갑자기 조용해지는 것도 조금 웃겼다. 걱정으로 가득 찬 눈을 하고, 평소라면 흐트러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옷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도 개의치 않고, 욕실에 들어가서 우선 따뜻한 물을 채우기 시작한다.
“발은 왜 이렇게─ 하아, 됐다. 네놈의 일이니 또 적당히 악상이 떠올랐니, 해보고 싶었니 하는 이유겠지.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라. 숲 길은 거칠어, 자칫 상처가 생겨 덧나기라도 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다.”
“넘어져서, 짜증나서 던졌는데, 축축한 신발을 다시 신기는 싫었어요.”
“넘어져? 보여봐라. 상처는 없나?”
“다행이도. 손바닥이 조금 까졌는데 빗물에 흙은 다 씻겨 내려갔어요.”
“밖에서 약품상자를 들고오겠다. 씻고 나오면 상처를 보여라, 소독하고 간단한 처치를 해 두지. 혹시 모르니까 병원에 가 보는 것이─”
“누가 겨우 까진 상처로 병원을 가요.”
당신은 자기가 다쳐도 큰 상처가 아니라고 신경도 안 썼으면서.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은 다시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다. 해도 별 상관은 없겠지만, 선배의 눈에 가득 찬 걱정이, 어딘가 가슴 한 구석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그냥, 그냥. 저런 눈을 하는 사람 앞에서 제멋대로 굴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알았어요.”
“흠, 좋아. 그럼 나는 상자를 들고 오겠다. 천천히 몸을 녹이고 나오는 것이 좋아.”
“알았으니까 어서 가요, 선배도 젖었으면서.”
물소리는 빗소리와 바뀐 것이 없는데, 이상하게 차갑게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분명, 물의 온도가 바뀐 탓은 아니겠지.
아, 이번 곡은 변주곡이 좋겠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2015.07.31 업로드
2016.02.26. 수정
2020.01.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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