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면, 선배는 늘 나보다는 따뜻했지.
한 여름이라도 장마철이 다가오면 꽤나 춥다. 여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로 온도가 내려가고 말지. 유감스럽게도 제 사랑해 마지않는 선배의 집은 탑이었고, 보온에 그리 적합한 구조를 가지진 못했다. 창 너머로 흘러내리는 빗물은 투명하고, 음률은 장난스럽지만 그 뿐이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추슬러 가디건을 여미고,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몇 번 비빈다. 악상이 떠오르지만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역시, 사람을 뮤즈로 삼는건 귀찮은 일이야.
며칠째 카뮤는 바쁘기 짝이 없다. 집에 붙어있는 날이 없고, 제대로 만족스럽게 말을 섞은지 얼마나지났는지 세는 게 무의미하다. 편지처럼 써내리는 가사들은 뜻을 담지 못하고, 악보 위로 늘어놓은 음표는 흐르지 못하고 뚝뚝 부러진다. 아, 짜증나. 한숨처럼 내쉬는 말이 부서진다. 늘 언어는 그렇다. 한심하고, 우매하고, 혀 위에서 무너지는 사탕 꽃같은 단어들. 음률 위로 올려도 깃털처럼 날아가버릴 음성.
고백하건데 저는 비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공기중에 그득히 들어찬 습기는 악기를 무겁게 만들고, 닫힌 공간 속에서 웅장하게 울리는 소리는 마음에 들지만 바이올린을 조율하는건 귀찮은 일이다. 더군다나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이 냉기. 축축하게 깔려서 뼛속 깊은 곳에 달라붙는 이 느낌은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꼭 혼자일 때 심하게 느껴지고.
굳이 보온이나 구조성을 따지지 않아도 선배의 집은 온기와 거리가 멀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음이, 그는 영구동토의 땅에서 태어나 온기와는 연이 없는 삶을 살았던 탓이다. 영하의 온도를 기분 좋게 느끼는 사람의 집에 굳이 보온과 난방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그는 전혀 불편함을 느낄 일이 없으니 굳이 이러한 구조의 피해자를 따지자면 더부살이 신세가 된 나뿐이다.
너는 털이 있어서 좋겠네. 구석에서 몸을 말고 자고 있는 알렉산더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저 개도 영구동토에서 태어났을 테니 추위에는 익숙하겠지. 손 아래의 부들거리는 털의 감촉을 즐기며 느릿하게 알렉산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좋은 소리를 내는 개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진다. 이럴 때는 제 주인하고 정말 꼭 닮았는데. 손 끝에 묻어나는 온기에 차갑게 얼어붙은 손가락이 서서히 녹아든다. 외로움에서 찾아드는 냉기는 어쩜 이렇게 지독한지.
척추를 유린하고 폐부에 스며드는 냉기는 타인과 숨을 겹치지 않으면 지워지지 않는다. 처연하게 울리는 빗소리는 서글프고, 손을 녹이겠다고 데운 물에 우려낸 차는 인공적인 향을 가득 피워낼 뿐이다. 입에 맞지 않는 물에서 피워내는 온기를 조금이나마 더 느끼겠다고 컵을 움켜쥐고 있으면, 희미하게 서러움을 닮은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굳이 따지자면 이 애매한 상황의 원인은 내게 있다. 오랜만에 생긴 오프를 같이 보내겠다고 별다른 연락도 없이 일본에 찾아온 것이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당연하게도 전혀 협의 되지 않은 방문에 선배는 당혹감을 표했고, 아주 이전에 정해진 스케줄을 겨우 연인의 투정에 바꾸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결국 저는 일주일 정도 선배의 집에 묵게 되었지만 그 뿐. 무언가 연인다운 시간은커녕 뮤즈에게서 악상을 받는 일 조차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마, 같이 듀엣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버릇이 짙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내 스케줄의 대부분은 카뮤와 함께하고, 스케줄이 없으면 그의 집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던 즈음의 버릇. 당연하게 내가 빈다면 그의 스케줄도 가득 차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다는 마음에 눈이 멀었던걸까.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아 허브티를 마시고 있으면 그가 마시던 지독하게 달콤한 커피의 향이 조금쯤 그리워진다.
느릿하게, 의식이 가라앉는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공백이 생기고, 물레처럼 돌아가던 사고는 서서히 그 속도를 늦춘다. 정적, 머릿속에 찾아드는 완벽한 정적 속에 빗소리만 일정하게 울린다. 톡, 톡, 톡, 쏴아아 하고 쏟아지는 소리. 제대로 잠을 못 잔게 3일 쯤 됐나? 머리가 무거워진다. 뚜껑을 내린 피아노의 차가운 감촉. 반질거리는 코팅 위로 뿌옇게 번지는 숨결. 체온에 따스하게 변하는 나무와 다정한 어둠.
검게 내려앉는 말들.
“어이, 여기서 잠들면 감기에 걸린다. 최소한 들어가서 자라.”
“으응…….”
“어이.”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어딘가 질린듯한, 못마땅한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 내가 알 바인가, 졸려. 웅얼거리며 눈을 감고 괴고 있는 팔로 파고들었다. 한숨소리. 한 순간에 몸이 따뜻해진다. 무언가 천으로 몸을 감싸고 들어올리는 느낌. 느릿하게 의식을 끌어올린다. 누군가의 온기로 따뜻해진 공기를 들이마시는 감각. 향수 사이로 희미하게, 겨울이 느껴진다. 첫눈이 오는 날이면 공기를 가득 채우는 향. 머리를 맑게 해 주는 차갑고 싸늘한 냄새.
“선배…….”
“아아, 나다. 정말, 이제야 정신이 든건가? 아무리 졸려도 최소한 잠은 제대로 된 곳에서─.”
“늦었잖아요…….”
졸음에 취해서인지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하는게 정확한가. 흐느적거리는 팔을 힘겹게 들어올려 그의 목에 감는다. 부드럽게 손 위를 스치는 머리카락, 목에 붙인 손의 엄지 부근에서 느껴지는 맥동. 몇 겹의 천 너머로도 전해지는 온기에 머리를 박고 부빈다. 조금 뻣뻣한 천의 감촉.
온다고 말했던 시간보다 늦잖아요……. 웅얼거리는 소리는 천 속으로 모두 사라졌다. 사실, 들었다고 해도 제 모국어는 카뮤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에 속하니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잠에 취해있는 의식으로는 무언가 서러워서, 어린아이처럼 품을 파고들며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기다렸는데, 시계만 계속 바라봤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촬영이 길어졌다.”
“문자라도 해 주지.”
“그럴 틈조차 없었어.”
평소의 당당한 선배를 떠올리면 믿을 수 없을만큼 변명같은 말이다. 그 사실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에게 변명을 한다는건 그렇게 해서라도 그 사람에게 미움을 사지 않고,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니까. 만족스럽게 가르랑거리는 고양이처럼 파르바네는 눈꼬리를 휘었다.
층계를 올라가는 일정한 흔들림이 기분 좋다. 머리카락 사이,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다시 느릿하게 가라앉는 생각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확실히 피아노 위에서 엎드려 잠든 건 좀 무리였나. 몸 깊숙한 곳까지 냉기가 스며든 느낌이 든다. 팔과 팔 사이가 허전한 감각. 누군가를 끌어안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그 순간.
파르바네는 저를 침대에 뉘이는 카뮤의 목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선배, 선배도 같이 자요.”
“아직 일이 남아있다.”
“그러지 말고, 응?”
어리광처럼 늘어지는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짓는 선배를 바라보며 조금쯤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했다. 나쁘지 않다. 분명 이렇게 부탁하면 선배는 들어줄테고, 다른 일에 쓰지 않는 이름이니까.
“크리스자드, 같이 자요.”
당황이나 낭패의 의미를 담고 일그러지는 눈가가 사랑스럽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짓궂은 걸까. 창밖에서 여전히 빗소리가 울리고 있다. 여전히 공기는 습한 냉기로 가득 차 있고, 보온이 좋지 않은 탑이라도 여름에 난방기구를 트는 건 그리 기분이 좋지 않다.
희미하게 눈꼬리를 끌어내렸을 때, 선배는 결국 한숨과 함께 패배를 인정했다.
“옷을 갈아입고 오지.”
“그대로도 괜찮은데. 그래도 정장은 불편하겠네요.”
“조금쯤은 참아라.”
“조금……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루종일 기다렸는데.”
칭얼거리는 말을 놓치지 않고 대답하면서 선배는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서로의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진 않지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도 조금 그런 기분이다.
눈을 감고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으면, 매트리스의 한 구석이 푹 꺼지는 느낌과 함께 머리 아래로 팔을 집어넣어 끌어안는 손길이 있다.
“이렇게 자게요?”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팔베개를 해 줄 뿐이다. 문제 없지 않나.”
“으응……. 팔이 저릴텐데.”
“이 정도, 깃털에도 미치지 못해.”
그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게 제일 대단한 점이네요. 작게 중얼거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든다. 어디든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라면 상관 없다. 여전히 몸 여기저기에 냉기의 조각이 박혀있고, 시린 부분을 녹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상대가 당신이니까 무엇이든 좋다. 보고싶었는걸.
심장께 어림에 머리를 대고 쿵쿵 울리는 심장소리를 듣는다. 선배는 손은 저보다 차가울 때가 많으면서 정작 몸통에 가까워질수록 뜨거워졌다. 일본에서 말하는대로 손이 차가운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다는 그런 이야기일까. 그 속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선배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리 틀리지도 않은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된다.
반복되는 소리들. 빗소리와 심장소리, 숨소리. 저녁 어스름이 지나서 희미한 빛만 남은 방과 희미한 온기. 느릿해지는 사고와 겹쳐지는 숨소리.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는 행복은 분명 여기 있다.
“선배, 그거 알아요?”
“무엇을.”
“의외로 선배, 이렇게 끌어안고 있으면 엄청 따뜻해요.”
“인간이니 당연한 일이다만.”
“그렇긴 한데……, 가끔 신기한 기분이 드니까요. 당신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사실을 아는건 저 밖에 없겠구나, 하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당연하게 그런 말을 내뱉지 말아요. 투덜거림을 목 속으로 삼킨다. 선배의 사랑은 당신의 체온을 닮아 있다. 얼핏 차가운 주제에, 가까이 다가서면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뜨겁게 타오른다. 무엇보다 서로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서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랑해요, 크리스자드.”
“아아, 나도.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어.”
행복해서 견딜 수 없다는 어조로 속삭이는 선배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 번 의식의 끈을 놓는다. 다정하고 따스한 어둠 속에서, 계속 그리워 했던 사람의 품 속에서.
2015.07.22 업로드
2016.02.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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